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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국경시장 / 김성중 / 1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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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

전깃불이 사라지자 바싹 내려온 달이 우리사이에 끼어 과음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부추겼던 것이다.

 

p.29

나는 무자비한 쾌락에 두들겨 맞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p.49

수명은 천재도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었으니까.

 

p.51

자르지 않은 케이크처럼 달콤한 무언가가 머릿 속에 들어있었다.

 

p.52

류는 예술 기계들을 풀어놓음으로써 대중으로 응도되어버린 도시만의 의식에 균열을 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 천재들에게 경탄한 군중이 언젠가 스스로의 표현 방식을 원하게 되는 것이 류가 시도한 혁명의 임계점이었다.

 

p.61

천재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왜 질투하는 인간이 되었는지, 결코 선택한 적 없고 되고 싶지 않던 모습의 노예로 살아야 했는지, 내가 왜 카인이 되어버렸는 지를 알고 싶었다.

 

p.66

미워하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는 법이다. 좋아하는 것만 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본질 말이다.

 

p.69

가벼운 행복, 그렇다. 꽉 찬 환희는 아니지만 기분좋을 정도의 게으름과 활력이 그에게 존재했다. 모든 사물이 제자리에, 자기 자신조차 제자리에 있었다. 완벽한 화음의 일부에 자신도 들어있는 것이다. 평생 흰건반으로만 사아오다가 검은 건반으로, 그러니까 플랫 하나 정도 올라온 감각이랄까.

 

p.70

그러나 사물은 기능을 발휘할 때보다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미학적이다. ... 인간도 마찬가지인 듯 싶었다. 더이상 사무원으로, 남편으로, 동료나 친구도 사용되지 않는 현재 표정이 가장 자연스럽고 행복하지 않은가 말이다.

 

p.82

소년 시절, 그는 많은 책들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보니 자리에 맞지 않는 견해를 드러내어 핀잔을 살 때가 많았으며 진지함은 개선되어야 할 단점으로 꼽혔다. 낙겸 씨는 책을 끊고 우왕좌왕하다가 소심한 성격까지 더해져 원치 않는 모습으로 살아왔다. 자극에 대한 반음으로만 이루어진 어른이 된 것이다.  무감각하게 살다가 감각이 사라진 것을 계기로 자신에 대해 성찰하다니 흥미롭지 않은가?

 

p.100

아그네스는 네모난 모자이크 조각 밖으로 한 치도 나갈 수 없는 육체들을 너무 많이 봐왔다. 식민 모국의 입맛대로 그어진 국경선 또한 이 떄륙을 뒤덮는 거대한 모자이크이기도 했다.

 

p.125

여왕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기적의 무의미함이었다. 그녀는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글을 읽을 수도 있으나 누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 뱀의 육체에 갇혀 있는데 언어를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p.129

왕의 최후는 경고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손에 놓인 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가 마을에 내려와 독니를 뽑히고 희롱당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것은 모두 인간의 독에 감염됐기 때문이다.

 

p.134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와도 소통할 수 없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무력감이 여왕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 이것이 자신의 본질이었다. 아무리 고민하고 사색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본능이 전부인 뱀의 모습.

 

p.138

... 이 글은 투명한 손가락으로 쓴 최후의 글이다. ... 없는 입술로 읊조린 허공의 말 ...

 

p.164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곡을 던져놓고 이전투구를 지켜본 끝에 가장 악한 자에게 트로피를 주다니, <불멸>은 신이 아닌 악마에게서 흘러나온 것임이 틀림없다.

 

p.172

나는 모자라는 지혜를 허세로 채울 수밨에 없는 서툰 반항아였지만 무엇에 반항하는지 알지 못했다.

 

p.179

여행지가 가장 좋아지는 순간은 그곳을 떠나기 직전이다. 이별이 가시화된 순간에야 사랑을 확인하는 연인처럼.

 

p.181

복도를 지나다보면 나 자신이 착륙에 실패한 우주로봇처럼 여겨졌다. 카메라와 현미경과 적외선 분석장치를 가졌지만 안테나를 펴보지도 못하고 통신두절이 돼버린 로봇.

 

p.198

나는 분홍색 초를 가장 좋아했다. 흰색에 꼭 한 방울의 붉은 물감을 떨어뜨린 듯한 여린 빛, 인간의 영혼 역시 순백의 상태보다 한 방울의 죄를 지닌 상태가 더 아름답다고 어른이 된 다음에 생각했다.

 

p.202

가로등과 네온사인은 아침 햇살 때문에 빛나는 지위를 잃어버린 것이 부끄러운지 창백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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